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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정보
마을이야기
옥천읍 하계리
하계리(下桂里)는 원래 읍내면(邑內面) 향청리(鄕廳里)와 대사동리(大寺洞里), 정곡리(井谷里) 등에 속해 있던 마을로서, 후에 옥천읍 하계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마을이름유래

하계리라 부르게 된 것은 마을의 큰 느티나무 세 그루 중 아래쪽에 나무가 있는 마을을 하괴→하계리로 부르게 되었다. 자연마을로는 하계와 샘실, 대사동리가 있는데 대사동리는 없어졌다. 샘실은 좋은 샘이 있다고 해서 샘실이라고 했는데, 주변 옥천특별농공단지에서 연못을 만든 이후 샘이 말랐다며 주민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마을역사

  • 1739년 :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읍내면 향청리에 77호, 정곡리에 7호, 대사동리에 15호 등이 살았다.
  • 1891년 : 신묘장적의 기록에는 향청리에 97호, 부곡리(符谷里)에 10호, 대사동리에 6호가 살았다.
  • 1910년 : 행정구역 개편 때에 군남면과 읍내면이 합하여 군내면이 되면서, 이 때 향청리가 상계리와 하계리로 나뉘었고, 부곡리와 대사동리가 하계리에 합해졌다.
  • 1917년 : 옥천면이 되고 1949년 옥천읍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계리는 옥천읍에 속해 있다.
마을의 인물
하계리의 대표적인 인물은 한국 현대시의 선구자, 정지용 시인이다. 1902년 옥천군 읍내면 하계리 40번지에서 태어난 정지용은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와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도시샤대학에서 유학한 뒤 모교와 이화여대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7월 경기도 고양군 녹번리(현재 서울 녹번동) 자택에서 잠시 다녀오겠다며 나간 뒤 행방불명됐다. 이후 월북작가로 분류돼 수십 년 동안 그의 작품을 볼 수 없었으나 동두천 소요산 근처에서 미군기의 기총소사로 사망했다는 북측 원로문인의 목격담이 최근 전해졌다. 정지용 시인은 새로운 감각의 현대적 시어를 구사한 개척자였으며, 이상을 비롯, 청록파로 불리는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을 발굴했고 박남수도 문단에 소개했다.
마을의 명소
하계리에는 정지용 시인이 1988년 복권된 후 문인 모임인 ‘지용회’에서 해마다 지용제를 열고 있고, 1996년 생가 복원에 이어 정지용문학관과 지용공원이 조성돼 있다. 정지용 시인 생가 앞으로는 시 ’향수’에서 노래한 것처럼 실개천이 마을을 가로질러 동쪽을 향해 나 있고, 황장군이 다리로 쓸 청석을 한 쪽 팔로 들어 날라다가 실개천에 설치했다는 전설을 간직한 청석교는 지금은 지용공원 내 실개천 모형에 걸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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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 옥천읍
최종수정일 : 2018.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