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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정보
마을이야기
옥천읍 상계리
상계리(上桂里)는 원래 읍내면(邑內面) 향청리(鄕廳里)에 속해 있던 마을로 후에 하계리(下桂里)에 속해 있던 마을로, 후에 옥천읍 상계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마을이름유래

상계리라 부르게 된 것은 마을 한가운데 큰 느티나무가 세 그루 있었는데 마을을 나누어 세 이름을 지을 때 괴목으로부터 위쪽에 있는 마을은 상괴, 아래쪽은 하괴라 하다가, 이름이 좋지 않다 하여 계수나무 계자를 써서 상계리라 하였다. 구읍 지역에서 교동저수지를 향할 때, 구읍을 가로질러 흐르는 실개천 왼쪽이 상계리다.향청리라 부르는 것은 이 마을에 고려 때에는 옥주, 그 후 조선시대에 옥천군 관아의 객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역사

  • 1739년 :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읍내면 향청리라 하여 77호가 살았다.
  • 1891년 : 신묘장적의 기록의하면 97호가 살았다.
  • 1910년 : 행정구역 개편 때 읍내면과 군남면(郡南面)을 합하여 군내면(郡內面)으로 개칭하면서 향청리를 상계리와 하계리(下桂里)로 나누었다.
  • 1917년 : 옥천면이 되고 1949년 옥천읍으로 승격된 후 오늘까지 상계리는 이에 속해 있다.
마을이야기
상계리에는 과거 급제자들의 명단을 적은 사마안(司馬案)이 전해오고 있다. 전해오는 사마안은 고암 정립 선생이 1627년(인조 5년)에 쓴 관성사마안과 1658년(효종 9년)에 송시열 선생이 쓴 사마안이 있다. 특히 관성사마안 서(序)에는 과거 급제자들이 후세에 이름을 전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처음으로 '사마록'을 작성한다고 적어 관성사마안이 상계리에서 처음으로 작성된 사마안임을 밝히고 있으며 백촌 김문기 선생을 충절의 표상으로 삼아 첫 머리에 기록했다고 전하고 있다.
마을의 명소
상계리에는 조선시대 중앙의 훈구파들이 장악한 유향소(留鄕所)에 맞서 진사(進士)와 생원(生員)을 뽑는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지방의 유생들이 설립한 사설기구인 옥주사마소가 있다. 옥주사마소는 현재 전국에 몇 개 남지 않은 사마소의 하나로, 이들은 ‘사마계’를 조직, 학문을 교류하기도 하고 정치를 논하기도 했는데 과거 급제자들의 명단을 적은 사마안(司馬案)을 작성하여 유대감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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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 옥천읍
최종수정일 : 2018.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