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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정보
마을이야기
안내면 도이리
도이리(桃李里)는 원래 정곡리(正谷里)에 속하였던 마을이었으나 후에 도이리(桃李里)로 분구되어 현재에 이른다.

마을이름유래

도이리(桃李里)는 “도리골”을 한자화하면서 한글 발음대로 도리(桃里)라 썼다. 그런데 도리(桃里)란 뜻은 복숭아와 오얏이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어진 사람을 비유한 말로 1864년 용촌리에서 후율당을 이곳으로 옮긴 후 어진사람이 많이 탄생하라는 뜻으로 도리(桃里)라 칭하게 되었다. 마을의 이름을 “도리골”이라고 불렀는데 원래는 “도리골”이 아니고 “다리골”이란 옛글로 “다리”가 “들”이란 뜻이 되므로 “다리골”은 마을 앞에 “들이 있는 골”이 되며 동대리에서 안내천이 마을앞 들판을 돌아간다는 주장도 있다. 즉 “다리”라 하면 흔히 해석하기를 내를 건너다니는 다리(橋)로 보고 있고 거의가 교(橋)로 쓰고 있으나 잘못된 해석으로 옛글에서 들(野)이 되는 것이다.

마을역사

  • 1739년 :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정곡리(正谷里)에 85호가 살았다.
  • 1891년 : 신묘장적의 기록에 의하면 113호가 살았다.
  • 1914년 : 행정구역 일제 조정 작업 시 “도리골”을 따로 떼어 도이리(桃李里)라 하였다.
마을이야기
마을에 전해내려오고 있는 문화유산으로 충청북도 기념물 제13호 후율당이 있다. 후율당은 1584년 중봉 조헌선생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이율곡선생의 뜻을 계승하여 후진들을 가르쳤던 곳이다. 지금은 조헌(1544∼1592)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조헌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김경백 등과 의병 1,600여명을 모집하고 승병인 영규대사와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충청도 순찰사인 윤극형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 해산되어 700여명으로 금산전투에 참전했으나 모두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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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 안내면
최종수정일 : 2018.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