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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에 대자보를 붙였다(한겨레 온 4월 19일)
작성자 : 고은광순 작성일 : 2024-04-20 조회 : 10
담당부서 청산면
https://www.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438

이화여대에 대자보를 붙이다/ 카멜레온 번개변신여사 김활란

-긴급 토론회 /누가 여성을 모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가-



4월 8일 이대앞 기자회견 이후 총선에서 김준혁 후보가 승리했지만 애당초 당선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기자회견을 했던 것이 아니므로 이 참에 김활란에 대한 역사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긴급토론회를 마련했다. 4월 18일 1시 프란체스코 회관 [김활란의 친일. 반여성 행위에 관한 긴급토론회/ 누가 여성을 모욕하고 역사를 왜곡하는가] 유튜버들의 관심이 높아 실시간 생중계되었다.


김활란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뜨거웠다.


<해방 후 번개변신 한 카멜레온 여사>

감사하게도 토론회 전 여러분들이 관련 자료들을 귀뜸해주셨다. 그 속에서 나는 참으로 기가 막힌 자료를 보았다. 1945년 11월 30일 조선일보는 아래와 같은 기사를 보도했다.


조선일보 1945년 11월 30일. '현란한 학예회'를 위해 김활란은 800명의 학생을 동원했다.


<연합군의 노고를 위로. 29일 이전(梨專)서 환영학예회 아놀드 장관도 참관>

평화와 사유의 사도인 우리 연합군 앞에 감사의 선물로 삼가 노래와 연극을 드리나이다.

서울시 대현정 리화녀자전문학교(이화여전)에서는 29일 때마침 연합축 가운데 하나인 미국추수감사절을 맞이하야 동 대강당에서 ‘연합군 환영학예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오후 2시 문과를 비롯하야 음악과, 가사과, 교육과, 의학과, 약학과, 체육과, 미술과 등 여덟과 생도 800여 명과 김활란 교장 이하 직원 전원이 모인 가운데 ‘아놀드’장관 및 장교와 병사 수 원이 입장하야 먼저 ‘아놀드’장관으로부터 훈시가 있고 학교측으로부터 연합군의 오늘까지 싸워 온 노고에 깊이 감사한다는 고마움의 인사를 하였다. 끝으로 선물증정 만세삼창으로 감사의 인사를 마친 후 연합군을 중심으로 화기 넘처흐르는 가운데 만찬을 함께 하고 저녁때에는 역시 대강당에서 학예회의 현란한 막이 열리어 음악과 생도들의 아름다운 노래와 문과생도들의 이 날을 위하야 몇 주일 전부터 주야로 연습을 하여오든 ‘영어극’으로써 연합군의 향수 어리인 마음을 위로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고 김활란은 10월에 이화여자전문학교 총장이 된다. 기사에 따르면 김활란은 숨도 돌리지 않고 학생들에게 영어연극을 주야로 연습을 시켜 800명의 학생을 동원한 ‘현란한’ 학예회를 연 것이다. 참으로 번개같이 빠른 카멜레온 변신 아닌가.



이화여대 당국과 총동창회는 김활란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이후에도 여러 가지 변명으로 김활란을 비호해 왔다. 여성 교육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랬다거나, ‘용기 있게’ 친일을 했다는 궤변도 나왔다. 그렇다면 위와 같은 변신도 어쩔 수 없이, 용기가 있어서 친미를 한 것일까? 아니다. 그녀의 일생을 뒤쫓다 보면 그녀의 의식 속에는 민족도, 자주성도, 자존심도, 양심도, 양식도, 민주적 감성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교육자적 의식은 말할 것도 없다. 김활란은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번 긴급토론회 발제를 준비하면서 알게 된 것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려고    담당부서의 허락을 얻어 대자보를 학생문화관 벽에 붙였다.


학생문화관에 붙인 대자보. 학생들이 깊이 고민해주기를 희망한다. 아래쪽은 내가 어린 시절에 본 이모 사진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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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화동문께 드리는 말씀

고은광순(‘73 사회학/ 은예옥(’56 정치외교학)의 조카



총선기간중 김활란 7대총장의 행적이 세간에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역사는 감추어지거나 덮어지지 않습니다. ‘이화’는 이제라도 제대로 김활란에 대한 평가를 받아들이고 제대로 된 길을 걸어야 합니다.



제 이모 은예옥(1935~?)은 정치외교학과에 다녔습니다. (1956~1961) 재학중 미군을 만났고,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했고, 정신분열로 본인, 가족을 힘들게 하다가 수용시설에서 음식을 거부, 스스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번개 변신의 귀재 김활란>

김활란은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1937년 전후로 본격적으로 친일에 나섰습니다. 돈을 걷어 일본에 전달하고 ‘징병제를 감격스럽게 받아 유골이 되어 돌아오는 것을 영광으로 받들자’고 10년 가까이 글과 전국 강연에서 선동했습니다. 2천만이 죽은 중일전쟁은 1945년 8월에 끝났습니다. ‘45년 10월 이화여자전문학교 총장이 된 김활란은 11월 미군을 위한 ‘현란한 학예회’에 800명의 재학생을 동원, 노래와 영어연극을 공연(1945. 11. 30 조선일보)하여 미군의 환심을 삽니다. 학생들은 몇 주간을 주야로 연습했다고 합니다.

원수 영.미를 무찌르고 유골이 되어 영광되게 돌아오라고 선동했던 김활란이 영.미를 위로하기 위해 학생들을 동원, 순식간에 친미주의자로 변신하는 것은 번개처럼 빨랐습니다.



<정치적 목적으로 ‘여성’ 이용한 이승만과 파트너 김활란>

U.N.은 1947. 11. 14 총회에서 남북총선거로 단일정부(통일정부)를 세울 것을 43:0으로 결의하고 유엔한국임시위원단(60명)을 파견했습니다. 이승만은 김활란. 모윤숙을 통해 단장으로 선출된 K.메논을 수일간 공들여 회유한 덕에 반쪽나라의 최고권력자가 되었습니다. 단독정부를 세우려 했던 유엔의 당초계획이 무산되는 바람에 시작된 분단은 민족간 전쟁을 초래했지만 김활란과 모윤숙은 낙랑클럽을 조직하여 전쟁 중에도 부산 필승각, Sea Side 맨션 등에서 파티를 열었으며 미국 상대로 협상이 안 될 때 김활란의 지시로 호텔로 급파된 이대생들의 접대를 통해 일을 ‘성공’시켰다 합니다. (1952. 마이어협정)



권력욕이 남달라 미국을 등에 업고 반쪽나라의 최고권력을 잡게 된 이승만에게 ‘친일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는 처참하게 짓밟혔고 카멜레온 번개변신의 귀재 김활란은 그에 걸맞는 최적의 파트너였습니다.



민족의식, 역사의식, 자주의식, 민주의식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김활란에게 교육자의 사명감도 없었으니 이대생들은 그녀의 변신 도구, 출세의 도구로 이승만 임기 내내 동원되고 활용되었습니다. 1956년 정외과에 입학했던 내 이모 은예옥의 비참하고 절망적인 삶의 안내자는 바로 김활란이었습니다. (휴전 이후에도 7만 명의 미군이 주둔했습니다. 어린 시절 내가 보았던 사진 속 이모는 미군과 1:1 미팅 중이었고 잔디밭 위에는 같은 조합의 여러 쌍이 보였습니다.)



<김활란... 과오를 덮고 공을 부풀리지 말아야>

-“그 때는 다 그랬다”

친일 기회주의자들 변명일 뿐입니다. 농민. 노동자들은 일본 수탈에 맞서 처절하게 저항했습니다. (일 경찰 접수 5천건) 무력항쟁의 기록도 수백수천 건입니다. (김병균 저 해드림 출판사 2013)



-“여성교육의 선구자다”

이화애국자녀단을 결성(1938년)해 정신대 참여를 독려하고 뼛속 깊이 일본의 대화혼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가 해방후 즉시 이대생 8백명을 동원하여 이군 위로 학예회를 ‘현란’하게 준비하고 이승만 정부의 돈을 받아 로비를 위한 수많은 파티를 열어 외국인 접대. 위안. 로비에 활용했던 그녀에게 ‘교육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역사의식, 민족의식, 자주의식, 민주의식은 교육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까?



-“척양척왜(斥洋斥倭), 미국놈 믿지마라 일본놈 일어선다”-100년 전 선조들 경계의 말씀-

남쪽과 북쪽으로 동강난 휴전상태가 71년으로 접어든 것은 지극히 비정상적인 일입니다. 남쪽은 2024년 현재 미군. 일군도 모자라 70년전 참전국까지 끌어들여 압도적 힘으로 안보를

지킨다고 합니다. 북은 핵무력완성을 선포한지 오래고 외국의 전문가들은 한반도 핵전쟁 가능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강대강 대결의 끝은 공멸입니다.

1947년 유엔총회는 단일정부를 세우려했지만 이승만. 김활란. 모윤숙의 활약으로 첫단추가 잘못 끼워졌습니다.



이화여대가 김활란의 모든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 한 김활란과 이화여대를 향한 역사의 매서운 눈초리는 두고두고 거두어지지 않을 것이며 이화의 교육도 역사 앞에 빛과 소금이 되는 당당한 인재를 배출할 수 없는 허접한 것이 될 것입니다. 이화의 카멜레온 번개변신이 아닌 진정한 진화를 갈망합니다.

2024. 4. 19 고은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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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가슴 속에 슬프게 남아있었던 이모.    이제 이 사진의 의미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60여년전 그녀의 사진 한 장을 양지로 끌어내면서 이모에 대한 슬픈 기억을 지우고자 한다.


아무쪼록 학교당국, 총동창회, 총학생회를 비롯 이대생들이 이번 기회에 김활란의 문제를 깊이 있게 생각해보기를 기대한다.



<김활란이 온 힘 다해 보좌했던 이승만은 돌팔매 맞고 쫓겨났다>

이승만은 1960년 3.15에 엄청난 선거부정을 저질렀다. 어느 지역에는 찬성표가 115%가 나왔을 정도였으니 그 추악함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화난 민중은 4.19혁명을 일으켰다. 1961년 1주년 기념 통일촉진궐기대회에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하느냐!”라고 외쳤던 학생대표 이수병은 한 달 뒤 발발한 5.16 군사쿠데타 정부에서 15년 형을 선고받고 7년을 복역했다. 그러나 1975년 2차 인혁당 사건으로 결국 사형당하고 만다('민족'이라는 단어가 사회적 이슈가 될 때마다 미국은 초긴장 했다.)

CIA국장 앨런 덜레스는 퇴임후 1964년 BBC 인터뷰에서 “5.16 쿠데타는 CIA의 가장 성공적인 해외공작”이라고 털어놓았다. 보통 30년 이후 공개하는 미 정부 외교문서의 경우와 달리 미국 정부는 516 이전 34일간의 외교문서를 비밀해제하지 않고 있다. (미국은 감추고 있는 문서를 공개하라!)




각국은 자기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행동한다. 그러니 선조들이 미국 믿지말고 일어서는 일본을 경계하라 하신 것이리라.


<김활란, 다시 박정희를 위해 발 벗고 나서다>

김활란은 이화 3인방 중 하나였던 동료 박마리아와 그 가족(이기붕, 이강석, 이강욱) 모두가 자살(타살?)하고 이승만이 하야한 다음 해인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즉시 미국으로 날아가 박정희를 위한 로비에 나섰다. 7월7일 박정희 앞에서 방미보고를 했던 김활란. 참으로 카멜레온 번개 변신의 귀재 아닌가.

척박했던 여성의 교육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민족정신이 살아 나라가 건재하면 여성 교육 역시 망가질 수 없다. 역사의식 없고 민족정신 자주의식 모두 내 버린 기회주의자들이 한반도의 고비고비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큰 민족적 비극이다.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키자 즉시 미국으로 날아가 박정희를 비호했던 김활란. 7월7일 박정희를 만나 방미보고를 하고 있다.


출처 : 한겨레:온(http://www.hani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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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 2018.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