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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의 좌우날개로 날다(3/16) -일본 대중문화 수용과 적극적 사고
작성자 : 고은광순 조회 :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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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2월 5일 한겨레신문 1면 '한겨레 논단'
리영희 한양대 교수

최근 일본 주재 우리나라 대사가 서울에서 열린 공관장회의에서 일본의 영화·가요 등 대중문화에 대한 문호개방의 필요성을 공언한 것을 계기로, 지난 몇십년간 반복되어온 시비와 논란이 또 재연되는 것 같다.

일본 대중문화의 국내 허용에 대한 찬반론은 적어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30년 동안 마치 주기적 행사처럼 거듭 되었다. 따라서 찬반의 이유와 명분은 새삼 되풀이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이제는 우리의 태도를 정리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언제까지나 "시기상조"일 수는 없다. 혹시 아직도 일제 식민통치의 역사적 감정을 근거로 일본의 대중문화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에 대한 모욕이 되지 않을까 두렵다. 내년이면 일본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만 50년이 된다. 우리는 민족으로서나 국민으로서나, 그리고 개인으로서도 완전하다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기확인"의 수준까지는 성숙했다고 생각한다. 사물판단에서 감정의 차원을 벗어나는 데 50년이 부족하다면 몇백년이 걸려야 어른이 된다는 말일까.

영화계의 산업적 이해관계는 고려해야 할 문제이다. 하지만 그 문제는, 이미 우리 영화산업에 적용하고 있는 미국·홍콩·이탈리아·중국, 심지어 옛소련·동유럽 등 여러 나라 영화와의 관계에 보태지는 것이지 일본영화 단독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일본 대중문화도 다른 나라의 그것에 대한 관계규정에서 예외일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나는 이 나라의 어느 누구에 못지 않게 일본에 대해 엄혹한 자세를 견지하는 한 사람으로 자처한다. 그럴수록 일본 문화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중성"이랄까 "양면성"에 당혹감을 느낀다. 어쩌면 "자기기만"이기도 하다.

우리 국민생활과 개인생활 속에는 이미 모든 면에서 일본 문화가 포화상태를 이루고 있다. 크게는 국가의 자본주의제도의 운영방법에서부터 작게는 여성잡지를 가득 채운 취미생활과 "가라오케"에 이르기까지. 흔히들 말하는 우리 청년 학생들의 일본 모방이라 한들, 성인 세대들의 일본 회사 경영방식이나 공장 관리 방법의 모방보다 특별히 더할 것도 없다. 그러기에 문제는 대중가요나 영화류를 거부하느냐 허용하느냐가 아니다. 그것들을 얼마나 현명하게, 준비를 갖추어서, 그리고 문화적 자주성을 가지고 받아들이느냐가 이제부터의 문제인 것이다.

일본 대중문화도 여느 어느 나라 또는 민족의 그것과 다름없이 옥석과 명암을 아울러 지니게 마련이다. 일률적으로 선할 수도, 통틀어서 악할 수도 없다.
어느 정당의 대변인이 "왜색풍의 퇴폐적인 문화 형태를 젊은이들이 모방할 위험성"을 걱정했다는 글을 본다. 젊은이들을 걱정하기보다는 기성세대의 일본 숭배, 일본 모방이 남한 사회를 무분별하게 "일본식"으로 포화시킨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내용의 "퇴폐성"으로 말하면, 미국식 대중문화의 퇴폐성보다 더 퇴폐적인 문화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미국의 영화·비디오·음악·가요가 다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영화는 쏘고, 찌르고, 죽이고, 빼앗고, 강간하고, 파괴하는 병적인 행위를 내용으로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 문화를 살펴보자.

"양키문화"의 퇴폐성·저질성·범죄성·잔인성은 이 나라의 젊은이들의 정서 속에 고름처럼 스며들게끔 방임된 지 오래다. 국가의 대미예속 때문에 차라리 국가적으로 제도화되어 있다고 함이 옳을 것이다. 유독 일본영화라고 미국영화나 홍콩영화보다 더 범죄적이고 퇴폐적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진정 우리 젊은이들이 영화를 보고 무조건 모방할까봐서 걱정할 것은 차라리 미국영화는 아닐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에게 그런 비판력과 문화적 자주의식이 있다면, 미국영화가 국내 영화관의 70% 이상을 지배하는 현실에서 몇 편의 일본영화가 선별적으로 상영되는 것 때문에 "젊은이들의 장래"를 크게 "걱정"할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싶다. 초기의호기심 단계를 지나면 말이다.

문화적 접촉은 적기보다는 많을수록 좋다. 반공주의라는 부정적·폐쇄적 문화관에 젖은 남한인들에게, 지난 몇해 사이에 볼 수 있게 된 옛 공산주의 사회의 영화들이 던져주는 예술적·문화적감동이 얼마나 신선한가! 일본영화도 배척하기보다는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 수용이 대세이고 합리적이라 한다면, 우루과이라운드와 쌀시장 개방 때의 한심한 경우처럼, 정부와 지식인들은 정치적 또는 체면상의 이유 때문에 자기도 믿지 않는 말로써 일시 대중을 우롱하는 언동은 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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