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가 된 선비와 승려
청주성 전투에서 만나 금산전투에서의 최후를 맞이하기까지
1000여명의 의병과 함께 보은의 차령에서 격전 끝에 왜구를 물리친 조헌 선생은 청주성 탈환을 위한 전투를 맞게된다. 청주성을 점령한 왜군들은 청주 남방에 위치한 호서지방을 점령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당시는 청주방어사 이옥(李沃)등의 군대가 잇달아 무너지고 오로지 승장(僧將) 영규대사(靈圭大師)의 군대만이 홀로 적병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조헌선생은 급히 군대를 이끌고 청주로 향하였다.
선생은 도중에 방어사 이옥을 만나 그의 군사 오백 명을 청주로 진군토록 하는 한편,
자신이 이끄는 의병과 영규대사의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공격하자고 제의하였다.
선생은 도중에 방어사 이옥을 만나 그의 군사 오백 명을 청주로 진군토록 하는 한편,
자신이 이끄는 의병과 영규대사의 승병과 합세하여 청주성을 공격하자고 제의하였다.
승장 영규와 의기투합한 선생은
방어사 이옥의 군대도 합세할 것을 촉구하여 이옥이 연기현(조치원)에서 진군 하여 선생의 의병과 영규대사의 승병, 이옥의 관군은 마침내 합군(合軍)하여 선생의 지휘아래 청주성을 공략, 혈전에 혈전을 거듭한 끝에 청주성을 수복하기에 이른다.
청주성의 수복은
청주지역의 회복만이 아니라 왜군이 호남지역와 충청도로 진출하는데 교두보역할을 할 수 있는 거점을 빼앗은 큰 쾌거였다. 이후 조헌선생의 의병과 영규대사의 승병은 금산전투에 임하고 왜군을 협공하기에 이르나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선생과 영규대사를 포함한 의병과 승병 모두가 죽는 그 순간까지 싸워 700명의 의병 모두가 전사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청주성 전투에서 만나 금산전투에서의 최후를 맞이하기까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의병장 조헌선생과 승병장 영규대사는 한 자리에 묻히지 못했지만 그 넋이나마 한자리에 두고 두 원혼을 달래고자 영정각을 짓고 위패를 한데 모셔 매년 제를 지내고 있다.
두 분의 위패가 모셔진 곳은 옥천군 답양리 깊숙한 산중에 자리하고 있는 전통사찰 가산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