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율당을 찾아서
하던 공간이기도 했다
조헌선생은 10만양병설을 주장했던 조선의 대 학자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제자이자 율곡선생이 살아생전 아끼던 인물이 조헌선생이었다.
선생은 율곡의 사후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보은현감(報恩縣監)을 파직당하고 옥천(沃川)에 낙향(落鄕)하여 살 때 선생을 사모하여 그의 뒤를 잇는다 하여 자신의 호(號)를 ‘후율(後栗)’이라 하고 용촌 밤티(栗峙)에 당(堂)을 짓고 ‘후율당(後栗堂)’이라 하였다 한다.
삼거리에서 보은방면으로 우회전하여 계속 직직하여 3km 지점 정방사거리에서 반 좌회전하여
보은 방면으로 500m 지점 길 건너에 “우측으로”를 의미하는 간단한 화살표와
한문으로 ‘後栗堂’이라 새겨진 표지석 건너 우측 길로 접어들면 400m 지점 우측 후율당에 닿게 된다.
중봉선생이 학덕 있는 선비들과 더불어 지내면서
학문을 논하고 문하생들에게 강학을 하던 공간이기도 했다.
율티의 후율당은 선생의 사후 퇴락되어 가던 중 철종(哲宗) 5년(1854) 후손들이 옥천군 백양동에 이건(移建)하였다가 고종(高宗) 원년(元年)(1864) 현위치로 옮겼으며 1977년 중건(重建)하여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 삼고 있다.
후율당은 돌담으로 둘러쳐 있고 북쪽으로 삼문이 나 있는 구조이다. 후율당의 삼문은 표충사와 같은 건축양식을 취하였고 문의 기능도 같다.
안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다가서는 후율당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측면의 칸이 정면의 칸보다 좁아 가로 면이 넓고 세로 면이 좁은 직사각의 공간을 이루고 있으며 1층의 기단위에 세워졌다. 기둥은 민흘림 기둥이고, 기둥머리에 공포를 짜올린 익공식 구조이다.
대개가 사당은
맞배지붕 건물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비교적 화려한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축양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선생이 살아 있을 때 학문을 논하고 강학을 하는 공간으로 삼았던 건물을 이곳으로 옮겨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사당으로 삼아서 였을 것이다.
당내에는 광해군 13년(1621)에 판간한 항의신편(抗義新篇) 판목(板木) 125매와 유림시판(儒林詩板) 10매, 선조가 내렸다는 조서(詔書) 1매가 보존되어 있으며 경내(境內)에는 금산(錦山)에서 중봉 선생을 대신하여 죽으려 했던 아들 완기(完基)의 효자각이 있다.
사당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분지가 발달하여 벼농사를 많이 짓는 안내면 도이리이다. 도이리는 원래 도리골, 또는 도이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에 도이동과 지내를 병합하여 도이리라 하고 현재에 이른다. 도이는 “도리골”을 한자화하면서 한글 발음대로 도이라 썼다.
그런데 “도이”란 뜻은 복숭아와 오얏이란 뜻으로 보기 쉬우나, 이는 어진 사람을 비유한 말로 후율당을 이곳으로 옮긴 후 어진 사람이 많이 탄생하라는 뜻으로 도이라 칭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