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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정보
마을이야기
안내면 인포리
화인리는 고려때부터 운영하던 역(驛)이 있어 청산→보은→화인→옥천 통하는 역로(驛路) 중에 있던 역이 있었으며 출장중인 관리들의 숙식을 제공하여 주던 화인원(化仁院)이 있었기 때문에 화인리라 부르게 되었다. 걸포는 “갈대가 우거진 갯벌”이었기 때문에 갈포라고 부르다가 한자화하면서 걸포라 부르게 되었고 수몰되어 높은 지대인 계곡으로 이주하였다.

마을이름유래

인포리(仁浦里)는 원래 안남면에 속하여 있었고 화인리(化仁里)와 걸포리(傑浦里)를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마을역사

  • 1739년 :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안남면 화인리에 54호가 거주하였다.
  • 1891년 : 신묘장적의 기록에 의하면 화인리에 50호, 걸포리에 38호가 거주했다.
  • 1914년 : 행정구역 일제조정때 화인리와 걸포리를 합하여 인포리라 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 1973년 :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때 그 관할이 안남면에서 안내면으로 변하였다. 인포리라 부르게 된 것은 두마을을 합하면서 화인리의 가운데 자인 인(仁)자와 걸포리의 포(浦)자를 한자씩 합하여 인포리가 되었다.
마을이야기
화인마을과 관곡마을을 연결하는 지점에는 특이한 모양의 바위산이 위치해 있다. 이 바위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들에 얽힌 재미있는 얘기가 전해지며, 왕이 대마를 타고 갔다는 대마산과 왕달이산에 대한 이야기, 원님이 나왔다는 원댕이 외에 망재봉, 무수배기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화인마을의 유일한 유물인 토막난 찰방비석이 마을의 한 집마당에 있었다. 또 조선시대 개화운동가로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이 태어난 곳이라고 전해지는 걸포마을에는 김옥균 선생의 선조가 모셔져 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인포리 남쪽 산 정상에 삼국시대 성터가 남아있다. 자연마을로는 화인(역촌지역), 걸포(서낭당이), 관골(찰방이 살았던 곳)로 나뉘어 있으며 1954년 5월 24일 개교한 안내중학교는 수몰되어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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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 안내면
최종수정일 : 2018.08.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