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가이야기1

  • 정지용문학기행
  • 정지용생가 답사기
  • 생가이야기1

시인 정지용의 요람
‘지용생가’

『인동차(忍冬茶)』정지용노주인의 장벽(腸壁)에 / 무시로 인동(忍冬) 삼긴물이 나린다. /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 도로피어 붉고 / 구석에 그늘지어 /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 흙냄새 훈훈히 김도 서리다가 / 바깥 풍설(風雪) 소리에 잠착하다. / 산중에 책력(冊曆) 없이 /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중에서

정지용 생가1
“시속의 노인은 세상을 피해 초가삼간 흙벽 속에서 무시로 인동차를 마시며 지내는 사람이다. 방에는 자작나무 숯불이 화로에 발갛고 그 훈기로 한쪽 구석에는 무우의 순이 파랗게 돋는다. 훈훈한 김에서도 흙냄새가 감돌고 밖에는 바람이 치는 엄동. 세월이야 어차피 흐르는 것, 달력은 봐서 무엇 하랴. 세상은 온통 하얗게 눈으로 덮였고...”

시인 신경림은 그의 책 ‘시인을 찾아서’에서 정지용의 시 ‘인동차(忍冬茶)’를 간단한 해설과 함께 소개하며 “얼마나 맑고 깨끗하고 높은 삶의 자세인가”, “동족상잔의 진흙 밭에서 뒹굴기엔 역시 지용은 너무 고고하고 도도한 시인이었다.”라며 정지용을 회고한다.

정지용 생가2
시인 신경림이 흠모해 마지않는 정지용은 6 · 25발발 와중에 갑자기 행방불명되고 그후 정부는 그를 월북작가로 분류해 그의 작품 모두를 판금시키고 학문적인 접근조차도 금지시켰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1988년에서야 그의 작품은 해금 되어 다시 우리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그 해금조치 직후 정지용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용회’를 만들어 모임을 갖게 되었으며 그 이듬해 정지용 생가는 비로소 복원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기에 이른다.

1996년에 원형대로 복원
되어 관리되고 있는

정지용 생가 가는길
정지용 생가는 구읍사거리에서 수북방향으로 청석교 건너에 위치한다. 구읍사거리에서 수북방면으로 길을 잡아 청석교를 건너면 ‘향수'를 새겨 놓은 시비와 생가 안내판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된다. 이곳이 정지용 생가이며, 생가 앞 청석교 아래는 여전히 ‘향수'의 서두를 장식하는 실개천이 흐르고 있으며 그 모습은 변한지 오래이지만 흐르는 물은 예전과 같아 맑기만 하다.

정지용 생가는 방문을 항상 열어두어 찾는 이에게그의 아버지가 한약방을 하였었음을 가구(家具)로 알리고 있으며, 시선가는 곳 어디마다 정지용의 시를 걸어놓아 시를 음미할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소리말을 달리고,”,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않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향수'의 시어 따라 방안에 배치된 소품 질화로와 등잔은 자연스럽게 ‘향수'를 다시금 음미하게 하고 있다.

정지용 생가는
두개의 사립문이 있다.

정지용 생가3
하나면 족할 것을 두개씩이나 문을 낸 뜻은 방문객의 동선을 고려하여, 또는 한 개의 문으로 드나드는 번잡함을 피하기 위하여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또 생가의 원형 그대로 복원했다 하니 물레방아 쪽 사립문은 텃밭 드나드는 용도로 원래부터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전통가옥구조 중 담 넘어 텃밭이 있으면 그곳으로 쪽문을 내어 텃밭을 일구는 경우가 있으니 그렇게 생각 한들 별반 문제는 없겠다.

정지용 생가에 간다면 이 두개의 사립문 중, 물레방아 옆의 ‘텃밭사립문(그냥 이렇게 부르고 싶다)’ 풍경을 눈여겨 볼 일이다.

사립문 언저리에 까치밥 남아 있는 감나무의 풍경은 정지용 생가인 초가와 잘 어우러져 초겨울 고향의 운치가 더욱 살아나는 곳이다. 군것질 거리가 귀했던 시절의 아이들까지도 까치밥만큼은 욕심내지 않았으며, 하루 중 어느 때. 꼭 까치뿐 만이 아니어도 낯선 새가 찾아와 감을 쪼고 있으면 그 모습이 반갑고 고마웠던 것이 우리네 정서였으니 그 아니 어울릴까.

콘텐츠 만족도 조사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어느 정도 만족하셨습니까?

만족도 조사

담당자 정보

  • 담당부서 문화관광과 김태흠
  • 전화번호 043-730-3402
  • 최종수정일 2018.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