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다녔다
일제가 강요하는 복장을 거부하고 우리의 전통 복장을 고수했다는 것은 학생들에게 은연중에 민족의식을 심어주려는 의도인 것이다.
이들은 동인지를 만들기로 합의했지만, 그들이 문단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당시 한국문단과 일본문단에 이미 알려진 정지용 시인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들의 입장과 지용의 시적 경향, 그리고 한국문단의 상황이 잘 맞아떨어져 이제 한국문단은 ‘순수시 운동'을 운위할 수 있게 되었다. 지용은 용아(龍兒) 박용철이 『시문학(詩文學)』에 이어 발간한 잡지 『문예월간』과 『문학』에 계속 작품을 발표했고 이런 인연으로 용아는 지용의 첫시집 발간을 주선하여 시문학사에서 『정지용시집』이 발간되었다.
종로 2가 백합원에 모여서 윗줄 왼쪽부터 김억, 이헌구, 이하윤, 김기림, 김동환, 아랫줄 왼쪽부터 최정희, 이선희, 노천명, 정지용
이러한 문학활동 가운데 이제 지용은 『문장(文章)』지의 시부문 고선위원이 되면서 30년대 시단의 중심에 자리잡게 된다. 『문장』지는 김연만이 출자하고 상허가 편집을 맡은 문예지였는데, 이 잡지를 출발로 하여 한국문단의 추천제가 정착되었다. 그만큼 추천이 엄격하고 권위가 있었다.
추천 분야는 셋으로 지용이 시를, 상허가 소설을, 가람이 시조를 맡았는데, 여기서 지용은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의 청록파 시인을 비롯해 이한직, 김종한, 김수돈, 황민, 박남수 등의 시인을 추천했다. 그는 추천을 하고 나서 꼭 추천사를 썼다. 이 추천사가 당시 추천을 받으려는 시인 지망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그 영향으로 지용의 아류가 양산되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개천에서 난 용’으로 성장해주기를 바라는 가족들의 기대감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기대감은 그를 긍지가 강한 인물로 성장하게 만들었고,
이는 유년의 불행을 극복하는 정신적 힘이 되었으며 커서는 문학적인 상상력을 완성시키는 정신적 자양이 되었던 것이다.
정지용의 생애는
-
유년기(1~16세)출생에서 옥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4년간 한문을
수학하기까지의 생애 -
청년기(17~28세)휘문고등보통학교와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 대학을
다니기 까지의 생애 -
장년기(29~44세)모교인 휘문고보 교사를
지내기 까지의 생애 -
말기(44~49세)해방에서 6·25전쟁 중에
납북되기까지의 생애
이러한 시기 구분은 시기별로 지용의 생애에 중요한 전환의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데 따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