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이름유래
마을유래비에는 지금 남평제 자리에 철을 다루는 어모소(於毛所)가 있어서 지내리 모산(毛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739년에 지내리라 불렀고 남평제가 생기기 약 200년 전인데 정말 소류지가 생길 것을 예측하고 못안이라 불렀을까? 소류지는 1930년도에 일제치하에서 만들어지고 남평제라 불렀으니 아마도 남평제(南坪堤) 이전에도 연못이 있었던 것을 재축조하고 붙여진 이름인 것 같다. 지수리에는 이평저수지와 1966년 준공된 세교저수지도 있다. 지내리는 못안을 한자화 한 이름으로 주민들은 지금도 이 마을을 모산이라 부르고 있다. 모산은 “못안”을 “몯∨안”→“모단” 으로 끊어 읽지 않고 연음법칙이 적용되어 “모산”이라 부르고 있다고 주민들은 말하고 있다. 이평(泥坪)은 진벌을 한자화 한 것으로 진벌은 진흙벌판, 진흙들판을 간략히 부르던 것으로 한자화하여 진흙니자와 들평자를 써서 이평이라 부르게 되었다. 세교(細橋)는 잔다리를 한자화 한 이름인데 세는 작다. 가늘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작은 다리가 있는 마을에서 유래된 듯 하다. 쇠보루(金峴)는 원래 청성면 합금리였으나 지수리에 편입되어 세가구가 살고 있다. 수동(水洞)은 물가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며, 주민들이 안진벌이라 부르는 분치날은 보리밭에 똥을 뿌려 놓으면 꿩이 내려와 먹는 형국같이 생겼다 하여 분치날이라 부르고, 예로부터 진벌 앞산에 묘를 쓰면 왕비가 난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육영수여사의 외할머니가 이곳에 묻혀 왕비가 난다는 명당자리임을 증명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마을역사
- 1739년 :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지내리에 67호, 수동리(물골)에 25호가 살았다.
- 1891년 : 년신묘장적의 기록에 의하면 지내리의 일부가 종배리(從培里)로 나누어지면서 지내리에 53호 수동리에 31호가 살았다.
- 1914년 : 지내리와 수동리(구비, 평촌)가 합하여 지수리(池水里)가 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