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조헌묘소와 표충사
기념물 제 14호로 지정
조헌선생의 묘소는 신도비에서 약 150m가량 북서쪽에 위치한다. 묘소는 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는 표충사와 영모제 사이에 언덕위로 난 돌계단을 오르면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제왕에서부터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조상의 묘를 소중히 여기고 정성껏 잘 관리하는 숭조사상(崇祖思想)과 충효사상(忠孝思想)이 독특하게 발전해왔다.
동물과 사람의 형상을 한 석물을 세워 무덤을 보호·장식해 왔으며
석물의 규모나 석물의 있고 없음은 죽은 자의 신분의 높고 낮음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이러한 풍습은
조헌선생 묘소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묘 앞에는 무덤 앞에서 제를 올릴 때 제물을 올려놓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으며 좌우에 문인석 두기가 서로 마주 보며 서 있는데 관복을 입은 문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렇게 묘역에 문인석을 세우는 의미는 문관의 묘역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죽은 자의 살아생전 권위와 위엄을 나타내며 죽은자의 혼을 지키고 위로하는 뜻이 담겨 있다.
또 선생의 묘소에서는 기둥모양의 망주석을 볼수 있는데 망주석은 죽은자의 영혼이 멀리서 알아보고 찾아올 수 있도록 무덤의 위치를 알리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한여름에 찾은 조헌선생의 무덤은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만개하여 화사하다.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군(僧軍)과 합세하여 청주성 탈환에 이어 금산에서 700명의 군사로 수만의 왜적과 싸우다 의병들은 선생과 영규대사와 함께 모두 전사한다. 그 후 선생의 제자들이 700 의사들의 유해를 거두어 한곳에 합장하고 선생의 유해는 별도로 옥천군 도리동에 안장하였으나 인조 14년(1636)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현재 묘역에는
묘비 2기가 있는데 하나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이곳으로 이장할 당시 선생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다.
조헌선생의 묘소는 충청북도 시도기념물 제 14호로 1976년 12월 21일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조헌선생의 묘소에서
아래를 보면 표충사 일대가 한눈에 조망된다. 표충사의 삼문은 솟을 삼문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솟을삼문은 가운데 문이 높고 양쪽의 문이 낮은 대문을 말하며 가운데 문을 ‘정문’이라하고 양쪽 문을 협문이라 한다.
보통 때는 양쪽 협문만 열어놓고 정문은 닫아둔다. 제사를 지낼 때 세 문을 다 열어놓지만 정문은 영혼이 들어오시는 문이라 하여 사람들은 드나들 수 없고 협문만 사용하는 것이 법도로 되어 있다.
단청을 하여 한껏 위엄을 높인 솟을삼문을 들어서면 ‘표충사’라는 현판이 달려 있는 사당이 정면에 배치되어 있다. 영정각은 1단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정면 1칸은 퇴칸이며 민흘림기둥이고, 기둥머리에 공포를 짜올린 익공식 구조이다.
사당에는 조헌선생의 영정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