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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면정보
마을이야기
안내면 현리
현리(縣里)는 본래 신라 때부터 고려때까지 현(縣)의 관아(官衙)가 있던 곳이므로 현리(縣里)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이름유래

현리는 창말과 신촌, 탑산이 등 3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는데 창말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안읍창(安邑倉)이란 창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촌(新村) 마을은 근자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신촌이라 불렀지만 대청댐 수몰로 위쪽 고지대로 이주하였다. 안읍창은 인근 2㎞지점에 금강(錦江)에 화인진(化仁津)이 있기 때문에 근방에서 거두어들인 각종 조세와 물품을 안읍창에 모아 두었다가 금강물이 많을 때에 금강을 통하여 서울 등지로 운반하지 않았나 사료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의 창고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창고라 하겠다.

마을역사

  • 1739년 :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현리(縣里)에 59호가 살았다.
  • 1891년 : 신묘장적의 기록에 의하면 현리(縣里)에 59호가 살았다.
마을이야기
마을의 앞산을 성재(화학산성)라 부른다. 이곳은 삼국시대에 신라에 속해있던 지역으로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역 이다. 여기에서는 유명한 관산성과 숯고개가 불과 30여리 거리이니 군사적 요충지이며 국경수비의 주요한 지역이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국경방비를 위한 성을 쌓고 이 마을에는 군량미와 군수물자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창고가 있던 곳이 지금의 창터(창말)이고 성의 옛자취가 이직도 남아 있는 산이 바로 성재이다. 탑산이는 현리사지(縣里寺址)가 있는 곳이며 1979년 까지 탑(塔)이 있었기 때문에 탑산이라 불렀고 마을 뒷산인 용문재(용목재) 남쪽 산정상에 삼국시대 탑산이 산성터가 있으며, 이곳에는 6·25때 월남한 피난민들이 4~5호 정착하면서 마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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